시대유감, "상스러움"에 관하여
저자거리의 사람들이 한국 정치가 상스럽다고 말한다.
여권 대선후보의 인생을 두고
이런저런 검증을 하다보니
정치와 대선이 상스러워졌다.
그 상스러운 인물은 어떻게
높은 지지율의 대선후보가 되었을까?
정치와 정치인의 상스러움은 그것을 지탱하는 유권자들과
그 유권자들이 구성한 문화의 상스러움에 기인한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문화란 삶의 방식이므로
우리의 삶이 상스럽다는 방증이다.
최재형 전 원장의 합장을 두고
기독교인들 사이에 논란이 일었다.
상스러운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되는 분을
빈약한 근거로 헐뜯는 것들에 마음이 쓰여
나는 쉬운 언어로 '합장'의 의미를 설명하는 포스팅을 했다.
여기에 달린 상스러운 댓글을 지우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네이버 지식백과의 "합장" 설명을 붙여놓고,
이정훈은 "미혹하는 자"라고 대뜸 육두문자부터 써놓았다.
네이버지식백과에 예수님을 검색하면
제대로 된 지식이 나오나?
불교를 전공한 사람입장에서 참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불교라는 종교 자체가
기독교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기독교에 익숙한 사람은 어디서부터 불교의 종교의례에
속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경건한 크리스천을
쉽게 우상숭배자로 정죄할 수 있다.
조계사에 몰려가 소란을 피운 사람들이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착각하는
"상스러운" 종교문화와 이 상스러운 종교문화가 스며든
한국교회의 현실이
이 작은 해프닝으로 이해가 되었다.
정치방역으로
예배가 불합리하게 또 불공정하게 제한당하는 상황은
기독교인으로서 억울하고 분한 일이다.
하지만,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
우리 스스로의 신앙을 갱신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예배를 목숨을 걸고 지키자는 구호는
여기저기서 들려 오는데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이있는
신학적 성찰은 찾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코로나 팬데믹 초창기에
일시적 현상일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몇몇 교단이 온라인 예배에 대한
신학적 입장과 기준을 제시했다.
그러나, 상황이 장기화되고
코로나가 일상이 되는 현실 속에서
교단별로 예배에 관한 신학적 입장을 깊이있게 정리해
성도들과 지교회에 제시하는 모습은 찾기 힘들다.
교단뿐만 아니라 예배에 관해
자기 성도들을 설교나 교육을 통해
깊이 있게 지도하는 교회도 소수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불안하고 헷갈린다.
문재인과 정은경을 타도하고,
백신이 짐승의 표가 맞는지 분별하는 것보다
이것이 성도들에게는 더 시급한 일이다.
교회의 역사에서
초기교회는 이단의 창궐과 정치적 박해라는
두 가지 위협에 직면했었다.
이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현재 당연시하는 삼위일체 교리 등이
체계화 되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정통교회의 신학이 견고해졌다.
신학이 없다면, 교회도 존립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위기와 박해는 은혜의 산물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가하게 신학타령이나 한다고
꾸짖을 분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것은 한가한 짓이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다.
자신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
무당의 일월성신과 동기동창인지?
아니면 선배인지? 모른다면,
그 분을 믿는다는 고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본질을 벗어난 열심은 모두 헛짓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의 진정한 위기의 원인은
문재인 정부도 아니요, 불공정한 방역정책도 아니다.
만약, 온라인이나 기타 대안적 형태의 예배가
신학적으로 절대로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다면,
예배인원이든 무엇이든 예배에 관한
어떤 제한도 수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면적 대비 최대인원이 출석을 한다고 해도,
불출석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없어도 질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성도들은
출석하고 싶어도 교회에 갈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사지마비 중증 환자는
병원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일까?
* 내가 온라인예배 옹호자인양 단정하고
악플 쓸 준비하는 분들은 일단 진정하시고,
문맥과 글의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해 보시길 권면합니다♡
악한 정부와 맞서기 전에
데이비드 웰스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교회의 신학실종 사태와 이에 따른 규범실종(윤리실종),
다시말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근거의 실종이라는
그야말로 비참한 "실종 사태"부터 해결해야만 한다.
그래야 악한 정부와의 싸움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몇몇 목사님들이 방역조치위반으로
교회폐쇄조치를 당해도
저항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 예배의 자리에 여러가지 이유로 참석하지 못한
그 교회의 성도들은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도 되는 것인가?
해당 목사님들의 깊이있는 설명이
성도들에게는 더 갈급할 수도 있다.
신학은 신학교의 교수들만 나눌 수 있는 고담준론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선불교의 선문답도 아니다.
단속하는 공무원이 "진정한 예배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욕설"말고는 답변이 잘 생각나지 않는
이 시대 교회의 비참함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공산당"이라서
핍박을 받은 결과가 아니다.
최재형 원장을 우상숭배자로,
그 분을 감싸는 이정훈 교수를 미혹한 자로,
정죄하는 그 "경건"의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의 상스러움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다운 경건을 회복할때
극복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지킬 수 없고,
예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예배의 자유"를 지킬 수 없다.
예수님이 주신 "자유"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율법주의로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죽일 수 있다.
젊은 신학생들과 일부 젊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 vs. 교회수호"라는 이분법으로
상황을 단순화시키는 세태를 보면서,
(이 두가지 구호는 대립하는 가치나 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상스러운 문화를 개혁하는 것이
참 고난의 길임을 새삼 느끼게 되는 아침이다.
주여 ~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시대유감, "상스러움"에 관하여
저자거리의 사람들이 한국 정치가 상스럽다고 말한다.
여권 대선후보의 인생을 두고
이런저런 검증을 하다보니
정치와 대선이 상스러워졌다.
그 상스러운 인물은 어떻게
높은 지지율의 대선후보가 되었을까?
정치와 정치인의 상스러움은 그것을 지탱하는 유권자들과
그 유권자들이 구성한 문화의 상스러움에 기인한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문화란 삶의 방식이므로
우리의 삶이 상스럽다는 방증이다.
최재형 전 원장의 합장을 두고
기독교인들 사이에 논란이 일었다.
상스러운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되는 분을
빈약한 근거로 헐뜯는 것들에 마음이 쓰여
나는 쉬운 언어로 '합장'의 의미를 설명하는 포스팅을 했다.
여기에 달린 상스러운 댓글을 지우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네이버 지식백과의 "합장" 설명을 붙여놓고,
이정훈은 "미혹하는 자"라고 대뜸 육두문자부터 써놓았다.
네이버지식백과에 예수님을 검색하면
제대로 된 지식이 나오나?
불교를 전공한 사람입장에서 참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불교라는 종교 자체가
기독교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기독교에 익숙한 사람은 어디서부터 불교의 종교의례에
속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경건한 크리스천을
쉽게 우상숭배자로 정죄할 수 있다.
조계사에 몰려가 소란을 피운 사람들이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착각하는
"상스러운" 종교문화와 이 상스러운 종교문화가 스며든
한국교회의 현실이
이 작은 해프닝으로 이해가 되었다.
정치방역으로
예배가 불합리하게 또 불공정하게 제한당하는 상황은
기독교인으로서 억울하고 분한 일이다.
하지만,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
우리 스스로의 신앙을 갱신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예배를 목숨을 걸고 지키자는 구호는
여기저기서 들려 오는데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이있는
신학적 성찰은 찾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코로나 팬데믹 초창기에
일시적 현상일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몇몇 교단이 온라인 예배에 대한
신학적 입장과 기준을 제시했다.
그러나, 상황이 장기화되고
코로나가 일상이 되는 현실 속에서
교단별로 예배에 관한 신학적 입장을 깊이있게 정리해
성도들과 지교회에 제시하는 모습은 찾기 힘들다.
교단뿐만 아니라 예배에 관해
자기 성도들을 설교나 교육을 통해
깊이 있게 지도하는 교회도 소수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불안하고 헷갈린다.
문재인과 정은경을 타도하고,
백신이 짐승의 표가 맞는지 분별하는 것보다
이것이 성도들에게는 더 시급한 일이다.
교회의 역사에서
초기교회는 이단의 창궐과 정치적 박해라는
두 가지 위협에 직면했었다.
이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현재 당연시하는 삼위일체 교리 등이
체계화 되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정통교회의 신학이 견고해졌다.
신학이 없다면, 교회도 존립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위기와 박해는 은혜의 산물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가하게 신학타령이나 한다고
꾸짖을 분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것은 한가한 짓이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다.
자신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
무당의 일월성신과 동기동창인지?
아니면 선배인지? 모른다면,
그 분을 믿는다는 고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본질을 벗어난 열심은 모두 헛짓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의 진정한 위기의 원인은
문재인 정부도 아니요, 불공정한 방역정책도 아니다.
만약, 온라인이나 기타 대안적 형태의 예배가
신학적으로 절대로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다면,
예배인원이든 무엇이든 예배에 관한
어떤 제한도 수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면적 대비 최대인원이 출석을 한다고 해도,
불출석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없어도 질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성도들은
출석하고 싶어도 교회에 갈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사지마비 중증 환자는
병원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일까?
* 내가 온라인예배 옹호자인양 단정하고
악플 쓸 준비하는 분들은 일단 진정하시고,
문맥과 글의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해 보시길 권면합니다♡
악한 정부와 맞서기 전에
데이비드 웰스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교회의 신학실종 사태와 이에 따른 규범실종(윤리실종),
다시말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근거의 실종이라는
그야말로 비참한 "실종 사태"부터 해결해야만 한다.
그래야 악한 정부와의 싸움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몇몇 목사님들이 방역조치위반으로
교회폐쇄조치를 당해도
저항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 예배의 자리에 여러가지 이유로 참석하지 못한
그 교회의 성도들은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도 되는 것인가?
해당 목사님들의 깊이있는 설명이
성도들에게는 더 갈급할 수도 있다.
신학은 신학교의 교수들만 나눌 수 있는 고담준론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선불교의 선문답도 아니다.
단속하는 공무원이 "진정한 예배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욕설"말고는 답변이 잘 생각나지 않는
이 시대 교회의 비참함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공산당"이라서
핍박을 받은 결과가 아니다.
최재형 원장을 우상숭배자로,
그 분을 감싸는 이정훈 교수를 미혹한 자로,
정죄하는 그 "경건"의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의 상스러움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다운 경건을 회복할때
극복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지킬 수 없고,
예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예배의 자유"를 지킬 수 없다.
예수님이 주신 "자유"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율법주의로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죽일 수 있다.
젊은 신학생들과 일부 젊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 vs. 교회수호"라는 이분법으로
상황을 단순화시키는 세태를 보면서,
(이 두가지 구호는 대립하는 가치나 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상스러운 문화를 개혁하는 것이
참 고난의 길임을 새삼 느끼게 되는 아침이다.
주여 ~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