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역설과 인권의 파국 [이정훈교수 칼럼]

사무국
2021-05-14
조회수 1008

 이 정 훈

 울산대학교 법학과 교수, 법학박사, 엘정책연구원장



 1. 인권의 서사

 한국의 진보적 인권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조효제는 자신의 저서 『인권의 문법』에서 ‘인권의 서사’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割愛)해 설명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인권’이란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우리가 일상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인권’이란 단어의 문법이 사실상 한국에 ‘존재하는 인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교실에서 학생으로부터 폭력적으로 위협을 당한 교사의 권리는 왜 학생의 권리보다 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가를 묻는다. 또한, 취객으로부터 경찰관이 정당하게 공무를 수행하다가 뺨을 맞는 사건 속에 등장하는 ‘인권의 서사’를 짚어내었다. 그는 심지어 소위 인권 전문가 집단에서 나타나는 ‘인권의 교조화 현상’도 지적했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담론 속에 등장하는 LGBTQ나 ‘젠더’ 개념 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민주주의의 ‘공론장’에서 무시하고 경멸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따끔한 ‘일침’이었다.


 필자는 조효제가 언급한 ‘인권의 서사’ 속에 등장하는 다소 황당한 한국적 상황들을 ‘인권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인권’이 민주주의 실현의 최고 가치인 것처럼 떠드는 ‘인권 인플레이션 시대’에 이러한 ‘인권의 역설’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그 원인과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하다.

인권사상이 ‘제도화(법제화)’ 되어 법체계에서 실현된 역사를 상고해 볼 때, 필자는 ‘인권담론’의 방향이 인권의 근거가 되는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과 이 가치의 근거가 되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제안하고자 한다.



 2. 인간은 왜 존엄한가?

 우리 헌법은 제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갖는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 권리는 양도 불가능하고,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초국가적’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위대한 ‘선언’이 현실이 된 상황 속에 살면서도 이 엄청난 권리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다. ‘인권의 역설’은 바로 인간이 ‘인권’의 가치와 내용을 주장하면서도, 그 본질적인 ‘근거’를 망각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라는 말씀은 언제나 모든 인권의 근거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메타 근거’가 된다. 이 말씀에 등장하는 ‘다스림’을 폭력과 억압으로 잘못 읽고, 지구환경 파괴의 책임을 기독교에 돌리는 무지의 ‘일갈’이 사회에 만연할 뿐만 아니라, 이 주장을 내면에 수용하여 자신들의 탈근대적 양심을 자랑하는 성도들이 창출해 낼 수 있는 상황이 바로 ‘인권의 역설’이기도 하다.


 이들의 주장에 기초해, 완벽한 환경보존을 위해 행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노아의 홍수’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처럼, ‘환경’이란 ‘가치’에 과도하게 집중할 때 역설적으로 인간은 ‘물’로 쓸어버려야 할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인권을 논할 전제와 근거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현상에 집중해서 하나님을 잊을 때 우리는 이와 같은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이념이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생각보다 하나님은 더 자비로운 분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에 기인한다. 마치 자신들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스스로를 세계에서 분리된 객관적 주체로 인식하고 인간들의 행위와 사회를 ‘대상화’한다. 실제로, 절대적 존재로서 인간과 역사를 관찰하시고 ‘섭리’로 다스리시는 분은 누구신가?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역설적으로, 참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는 인간의 노력이 성경이 가르치는 본질에서 살짝 빗나갈 때, 바로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의 죄성’이 드러나게 된다.

 양심적이고 인권 친화적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성도들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인권의 ‘메타근거’인 하나님과 성경을 ‘인권담론’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것을 돕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근거로 삼는다. 법의 역사에서 ‘평등권’이 실현된 것도 ‘인간의 존엄성’이 ‘피조물’로서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기 때문이다.



 3. 인권의 근거를 파괴하는 세계는 어디로 향하는가?

 오늘날 교회가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된 역사적 기반은 독실한 성도들이 계몽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인간의 존엄성’의 제도적 기초인 ‘자유’를 ‘제도화(법제화)’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법학자 옐리네크(Georg Jellinek)는 ‘자유권’의 헌법적 보장의 역사에서 칼빈과 개혁주의의 기여에 대해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이에 따른 종교의 자유는 종교개혁 당시 교회의 중요한 열망이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의 피와 땀으로 ‘종교의 자유’를 중심으로 하는 ‘헌법적 기본권’으로서의 ‘자유권’이 보장되는 시대를 열었다.


 필자가 201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던 ‘세계 법철학-사회철학 대회(IVR)’에 참가했을 때, 가장 주목했던 ‘강연’은 세계적 권위의 법철학자 ‘로베르트 알렉시’(Robert Alexy)의 ‘신학적 논의를 완전히 배제한 인권의 존재 논증’이었다. 그는 ‘인권’이 하나님을 완전하게 벗어나 철학적으로 논증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후, 세계의 지식계에서는 ‘인권담론’에서 성경과 하나님을 배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보편적 가치로 등장한 ‘정치적 올바름’ 테제가 기독교에 적대적인 ‘인권담론’을 견인하고, 이에 따른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한국에서도 많은 성도들이 여기에 동참하거나 이 테제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과연 ‘인권’을 21세기에 20세기보다 훨씬 더 월등하게 진보시켰는가?

 ‘다양성’을 미덕으로 강조하는 ‘정치적 올바름’은 ‘틀림’과 ‘다름’의 차이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 정치테제는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믿음’과 복음주의 기독교의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렸다’고 선언하고, 이것을 법으로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법학자 존 위티 주니어(John Witte Jr.)가 설명하는 것처럼, 정치와 법의 역사 속에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계몽주의 이신론자들과 협력하여 ‘자유’를 헌법적 권리로 ‘제도화(법제화)’ 하는데 성공했다. 필자는 ‘인권의 역설’이 이 시대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반기독교 인사들과 협력하여 제도화된 ‘자유’를 파괴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그리스도인은 종교개혁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성경적 세계관이 법과 정치를 포함한 세상의 전 영역에 우리를 통해 스며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가 되는 성경에 주목해야만 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한 ‘인권담론’은 인권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존엄하지 않은 인간이 되는데 동의하는 ‘인권의 역설’의 제도화를 실현할 수 있다. ‘인권’을 주장하는 인간이 ‘인권’의 근거를 파괴하면 그 끝은 어디인가? 하나님보다 ‘과학’의 승리와 ‘진보’를 믿었던 인간이 직면한 세계는 ‘세계대전’과 ‘대량학살’이었다는 역사를 잊지 말자.

후원계좌 : 하나 445-910016-12105 피엘아이

피엘아이

대표 : 이정훈 | 사업자등록번호 : 102-82-69091
주소 :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로39길 38-6 4층

전화번호 : 010-8121-1948 | E-mail : elipolicy1948@gmail.com 

Copyright ⓒ 피엘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