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본질(2) 청년들이 미래다 (2018.12.15) [PLI칼럼]

사무국
2018-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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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정책연구원에서 기독교적이고, 자유민주적, 그리고 공화주의적이며, 올바른 보수 우파의 가치와 원칙을 가진 차세대 정치 리더, 시민운동가, 학생운동가, 기자, 공무원 등을 양성하기 위한 PLI(Political Leadership Institute)를 시작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PLI가 설립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격적인 PLI의 시작에 앞서, 일련의 연재 칼럼을 통해 한국 사회에 PLI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필자주)

배리 골드워터는 공화당과 민주당 등 주요 정당에서 이념, 가치, 원칙을 들고 나온 사실상 첫 번째 미국 대통령 후보로 여겨지고 있다. 또 골드워터의 선거운동에 젊은 청년 지지자 약 50만 명이 자원봉사자로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해 무려 150만 명이 골드워터의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 소액 기부에 동참하는 등 – 미국 선거에서는 표(유권자)와 돈을 많이 확보해야 승리한다. 그래서 후보자는 표 확보와 펀드레이징 두 가지를 위해 바쁘게 뛴다. - 미국 정치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다. 그리고 골드워터는 선명한 보수의 이념, 가치, 원칙을 제시하면서 1960년대 베트남 전쟁 참전 이후 계속된 반전 시위와 흑인들의 인권 운동, 여성 운동, 히피 운동 등에 참여하는 이들의 거리 시위와 데모, 폭동, 도덕적 타락과 성문란 등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미국 사회와 시대 속에서 보수적, 자유주의적 원칙과 가치를 찾던 젊은이들을 공화당 진영으로 대거 끌어들였다. 그리고 이 골드워터의 아이들은 이후에 레이건과 부시로 이어지는 공화당 전성 시대를 열었으며, 쇠락해가던 미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재건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골드워터는 공화당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사에서 아주 큰 의미를 가지는 인물인 셈이다. 젊은 피의 수혈은 항상 생명과 역동성, 열정, 미래와 희망을 가져온다. 청년들을 끌어들이는 이들이 결국에는 승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골드워터가 일으켰던 청년 돌풍의 배후에는 당시 ‘보수주의의 정신적 지주’와 같았던 예일대 출신의 윌리엄 버클리가 있었다. 그는 1955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사회에서 점점 심각해지던 지성계의 좌경화를 막기 위해 보수 잡지인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를 창간해 자유시장주의, 사회적 보수주의, 전통적 보수주의, 반공적 보수주의 등 다양한 보수주의 내 계파를 한 곳으로 묶는 역할을 하면서 잡지를 통해 보수주의를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그는 다만 음모론 등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은 극단적 보수주의는 비판하고 배제시켜 보수 자유 우파는 물론 중도와 좌파들로부터도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또 포스트 모더니즘과 히피 운동 등으로 급속도로 세속화되던 미국 사회에서 윤리와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 했다. 그는 현대 좌파 운동이 기독교 진리에 바탕을 둔 서구문명과 가치를 파괴하고 있다며 아주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다. 역으로 그는 구닥다리, 퇴물 취급을 받던 보수 이념을 가지고서도 오히려 당대의 지식인과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정도로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 이론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말로만 떠들고 글만 쓴 것이 아니라 보수 자유 우파 청년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1960년에 ‘자유를 위한 젊은 미국인(Young Americans for Freedom, YAF)’라는 단체까지 조직했고, 골드워터가 참패한 바로 1년 뒤인 1965년에는 당선이 100%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치 실험을 위해 본인이 뉴욕주지사 선거에도 출마할 정도로 실천적이고 행동적이었다. 당시 뉴욕주지사로 나온 공화당 후보는 민주당 후보보다 훨씬 더 좌파적이었고, 버클리는 뉴욕에도 보수 지지자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뉴욕보수당이라는 제3당의 후보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3.4%의 지지를 받아 좌파의 요새와 같았던 뉴욕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버클리에 의해 일어난 이 보수 청년 운동이 바로 골드워터와 결합되면서 새로운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1964년 대선에서 골드워터는 상대 후보인 린든 존슨이 4천100만 표(약 61%)를 얻는 동안 고작 2천700만 표(약 39%)를 얻는 데 그쳤다. 이는 그 때까지 치러진 미국 대선 투표에서 가장 큰 표차 중 하나였으며(22.6%포인트 차), 이후로 나왔던 민주당 대선 후보들 중 그보다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후보가 없을 정도로 아주 충격적인 결과였다. 골드워터는 자신의 지역구인 애리조나 주를 포함해 미국 남부 지역 6개 주에서만 승리해, 전체 선거인단 표로는 겨우 52표를 얻어 무려 486표를 얻은 민주당의 존슨 대통령에 수모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이 때 하원 선거도 동시에 치러졌는데, 민주당이 압승해 1936년 이후로 공화당과의 의석수가 가장 큰 차이로 벌어졌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이 선거 결과에 대해서, 골드워터만이 패한 것이 아니라 보수 우파의 대의가 패배했다고 썼고, 대부분의 정치 평론가들도 여기에 동의했다. 당시 언론들은 골드워터는 물론이고 공화당이 입은 상처가 너무 커서 재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고, 이후 공화당 내에서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빚어졌던 주류인 중도 온건파와 골드워터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주도권 싸움이 계속해서 치열하게 벌어졌다.

골드워터 이후 공화당이 “이념과 행동”을 강조하는 정당이 되기까지 공화당 내에서 엄청난 진통이 있었다. 특히 골드워터의 노선을 따르는 이들은 당 밖에서는 물론이고 당 안에서도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당시 공화당의 주류는 중도 온건파 당원들이었고,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공화당은 미국 남부 지역이 아니라 미국 동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골드워터 이후로 남부 지역이 공화당 지지로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 공화당은 1928년 허버트 후버부터 1960년 리처드 닉슨까지 모두 중도 성향의 대선 후보를 내세웠었고, 1964년 공화당 대선후보로도 미국의 대부호 존 D. 록펠러의 손주이자 중도 온건파인 넬슨 록펠러가 유력했다. 하지만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언더독이었던 골드워터가 승리했는데, 이 와중에 양측의 네거티브 선거전이 최악의 수준으로 치달았다. 양 진영에서 가시 돋친 말들이 오고 갔고, 골드워터 대선 참패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골드워터에게 전쟁광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도 바로 록펠러였다. 린든 존슨 진영이 골드워터에 반대하는 공화당원의 말을 인용해 골드워터를 공격할 정도로 양측은 완전히 앙숙이 됐고, 록펠러측이 경선 과정에서 심어준 골드워터에 대한 나쁜 이미지들은 대선에서 치명타로 작용했다. 공화당의 자중지란이 린든 존슨의 압승에도 영향을 미쳤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던 것이다. 골드워터의 진영도 비록 보수의 이념, 가치, 원칙에는 충실했지만, 청년들이 중심이다 보니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 있었던 셈이다. 어쨌든 공화당은 골드워터의 보수 우파와 넬슨 록펠러의 중도로 완전히 분열됐다. 중도 온건파는 골드워터를 대선 후보로 인정하지 않았고, 골드워터도 자신이 공화당 대선후보로 결정된 후에도 후보 수락연설에서 반대측에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 정도로 앙금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중도는 미덕이 아니다며 반대파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했고, 록펠러도 “(극단주의자는) 미국인이 아니다. 공화당은 이들을 거부해야 한다”고 등을 돌렸다.

지금도 공화당 내에는 중도, 온건을 표방하는 세력이 존재하는데, 최근에 소천한 아버지와 아들 부시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때로 보수 우파 기득권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골드워터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아들 부시 대통령의 동생인 젭 부시와 치열한 설전을 벌이고 신경전을 펼쳤었다. 그리고 2016년 대선에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트럼프 대신 힐러리를 찍었다고 말했고, 아들 부시 대통령은 기권할 정도로 부시 가문과 트럼프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물론 골드워터와 록펠러가 보여준 것처럼 최악은 아니었다. 만약에 아웃사이더인 트럼프 진영과 공화당 주류 진영이 골드워터와 록펠러 정도로 심각하게 분열되고 싸웠다면, 지난 미국 대선에서 승자는 트럼프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골드워터는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뉴딜 정책 이후 좌편향되어가던 미국 사회와 반전 시위와 히피 운동 등으로 극단적인 혼란에 빠진 미국 사회에 대해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의 각성이 시작되었고, 윌리엄 버클리를 비롯한 보수 자유 청년들이 일어났다. 이들은 보수와 자유의 이념과 가치, 원칙을 이론적으로 재정립했으며, 이론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보수 청년 운동을 일으켰고, 더 나아가 정치세력화해 자신들이 지지하는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까지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통령까지 만들지는 못했는데, 아직 현실 정치에 아직 미숙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공화당을 심각하게 분열시켜 수모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갈고 닦고 개선했으며, 자신들에게 주어질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레이건 혁명이라는 달콤한 열매로 돌아왔다. (계속)


- 노승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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