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줄기 그 빛을 보며 진리에 목마른 분들과 함께 담대하게 한 길을 가고자 한다 (2018.07.26) [이정훈교수 칼럼 -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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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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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전술핵 배치 문제는 1970~80년대 독일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소련이 동독과 동유럽에 중거리 미사일을 일방적으로 전개하자 슈미트 총리는 ‘굴복하는 평화’냐 ‘생존을 건 도전이냐’를 고민했다. 그는 국민의 평화 욕구에 부응하기보다 국가 생존의 길을 선택했다. 슈미트는 카터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핵우산을 믿을 수 없다. 서독과 서유럽에 전술핵을 배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담판 끝에 소련의 핵미사일 수와 똑같은 전술핵 572기를 반입하기로 했다. 카터는 좌파 사회민주당 지도자인 슈미트의 결의와 핵 집념에 놀랐다고 한다. 카터의 마음을 움직인 건 핵 본성에 대한 슈미트의 치열한 성찰이었다.

2017년 중앙일보~전영기칼럼 중에서

내가 독일과 나토~미국의 동맹관계를 통해 독일의 통일과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시점은 2007년 부터이다.
통일을 말하면서도 객관적인 성찰을 하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패배자 카터 이후 레이건의 정책이 얼마나 탁월했는가 이해하면서 나는 소련과 동독의 선전선동을 무비판적으로 되뇌이던 자들을 추종했던 나의 무지에 대해 반성에 반성을 거듭했다.

소련과 동독, 동구에는 자유가 없었다.
인간을 감시하고 수용소에서 존엄성을 죽이는 체제가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자유를 누리고 있다.

스스로 자기 생존의 기반이 되는 군대를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해체하고 있는 한국을 보면서
세계의 역사를 상고할 때
호흡마다 폐부가 아파온다.

68혁명의 파리에서 두 번의 집회를 마치고
리옹역에서 기차를 탔다.
유럽에서 마주치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유쾌하다.
선글라스에 멋을 부린 풋풋한 모습이
나의 20대를 떠올리게 한다.
나의 사랑하는 학생들처럼 느껴진다.
성찰보다는 분노를 부추기는 선배들의
선동에 속아 그들의 정파적 이익을 위해,
지구 상 최악의 독재체제를 돕는 줄도 모르고
오늘도 엄지 끝으로
조국을 저주하고
지금 누리는 청춘의 자유에 대한 감사를
원망으로 바꿔 인터넷을 채우겠지~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나와 그대들의 자유가, 인간의 존엄성이
우리세대에서 끝이 아니길~

청년들이여
프랑스와 독일을 지나면서,
맛집과 클럽을 전전하는 중에도
브뤼셀의 야경에 취하면서도
한 번 쯤은 정말 진지하게
독일 통일의 역사와 나토의 역사를
진지하게 성찰해 주길 바란다.
우리의 역사를 성찰해 주기 바란다.
조국의 미래는 바로 그대들의 미래다.

파리의 한국식당에서 술에 취해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중년의 남자들을 보면서,
유럽에서 어떻게 대안적 사민주의가 가능한지
역사를 공부해보라고 권하고 싶었으나,
지금 한국에서 일부세력이 주장하는 사회주의가
당신들이 찬송하는 서유럽의 그것이냐고 되묻고 싶었으나,
우이독경일 것을 알기에 그냥 김치 맛에 집중했다.

세계적으로 그 유래가 없이
마르크스나 레닌을 한 번도 정독한 적 없이
그들의 주장처럼
그 역사를 변증적으로 성찰해 본 적도 없이
마르크스주의자나 레닌주의자가 된 사람들이 많은, (성경을 읽어본 적 없는데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이상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상할 것도 없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주장과 다르게 수출로 풍요한 나라가 되었던 이 신비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어쩌면 정신을 가다듬고 정상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자조하게 된다.

얼마 전 해외 출장길에서
로렉스를 사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광주 백화점의 유리문이 깨어졌다는
한국의 뉴스를 보면서
나를 향해 웃음지으며
"모두가 로렉스를 차는 것이 진정한 사회주의?"
라고 질문하는 외국학자의 썩소에 얼굴이 붉어졌던
나의 마음은 지금 오히려 차분해 지고 있다.

밀라노에서 집회를 마치면
조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윤리적이지 못해서 교회가 망해간다고
자신이 몸담은 교회를 저주하는 것으로
인기를 누리는 그 사람들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
조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영국교회는 도덕성이 부족해서 망했냐고 묻고 싶지만 나를 도덕에 무감한 자로 매도할 것이기에
이 질문도 사실 의미가 없다.
교회 세속화의 본질을 한 번도 성찰해 본적 없는
분들에게 이런 질문은 사실 과분하다.
사회주의=기독교라는 쿠터와 라가츠의 철지난 신학이 19세기가 아닌 21세기에 언어를 한국화하여 횡행할 줄 독일사람들도 몰랐을 것이다.

기독교의 세속화는 높아진 인간의 교만이 예수를 도덕선생이나 혁명가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정하고 인간의 반열로 끌어 내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알브레히트 리츨의 신학은 기독교를 윤리학으로 격하시키려는 시도이자 성경의 언어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물결의 탁월한 업적이다.
리츨이 살아돌아 온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한국교회의 언어들은 회심한 자인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기독교의 세속화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와 왕이신 그리스도를 분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묘하게 삶과 신앙을 분리시킨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임에도 죽지 않은 자신의 자아가 계속 왕좌를 차지하고, 반복되는 죄에 대한 죄책감을 해결해줄 구세주만 필요한 인간들을 위한 맞춤형 복음이 모든 문제의 출발이다.
구원파에 등록해야 구원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등록한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종교개혁의 독일과 영국처럼 기독교 윤리가 내면화 되고 체화된 역사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만큼 높아진 영국과 독일보다 우리에게 더 큰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감히 주장한다.
자랑할 것이 1도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그의 백성으로서 그를 왕으로 선포할 수 있는 은혜가 더 크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지 않은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난한 심령이자 겸손이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탁월한 영성을 보여줬던
위대한 신앙인들의 존재조차 조명하지 못하는
분들의 교회를 향한 저주는 교회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선각들을, 그 선각들 위에 계시는
우리 왕을 왕이 아니라고 부인하며 자기 의를 왕으로 모시는 와중에,
삶과 신앙을 분리시키는 것이 세속화인지도 모르고
이것을 가르치는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의 향연 속에서,

나는 한 줄기 그 빛을 보며 진리에 목마른 분들과 함께 담대하게 한 길을 가고자 한다.

우리의 자유와 존엄성이 이 세대에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기차는 이태리 방향으로 달리고 또 달린다.

파리에서 바젤로 가는 기차 안에서....
빚진 자~


2018년 7월 26일 이정훈 교수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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